100억 원 모금에 도전하는 부천희망재단 정인조 이사장
[정인조 KSoP 이사님]
<부천희망재단 정인조 이사장>
부천에서 YMCA, 부천희망재단 등 시민운동에 꾸준히 참여하며 총 수입의 12% 이상을 교회나 사회단체를 위한 기부금으로 사용한다. 정직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자식들에게는 50% 이하만 유산으로 물려주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한다. 부천희망재단 정인조 이사장(부천시 중4동, 67)이 43살 직장생활 때 세운 목표이다.
단순히 돈을 많이 번 성공한 사람이 아니다. 1987년 부천 YMCA의 시민대학 전단지를 보고 등록한 것에서부터 부천과 인연을 맺게 되어 2011년에 (사)부천희망재단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2014년 부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부천 100인 중 한 명이다. 경남 합천의 두메 산골 ‘소년 정인조’에서 부천 시민사회의 후원자가 되기까지 정 이사장의 인생을 배운다. 부천 전체가 한 눈에 보이는 원미동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소년 정인조
고향은 경상남도 합천. 독재자 전두환이 태어난 고향 바로 옆 동네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 대구로 유학 왔다. 고3때 입주 과외를 했다.
"교사였던 형이 서른 살에 군대를 가게 되어 집에 돈 벌어다 줄 사람이 없었어요.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말하니, 같은 학교 한 학년 아래 후배 집을 소개시켜 주셔서 숙식을 해결하였지요."
학교 다녀와서 2-3시간 가르친 후 자기 공부를 했다. 1학기엔 성적이 좋았는데, 과외를 하면서 남는 시간에 공부를 하니 당연하게 2학기 성적이 떨어졌다. 정 이사장은 어려운 고3을 견뎌내고 서울대학교 금속공학과에 합격했다.
상경하고도 쭉 과외로 먹고 살았다. 그때 한 달 하숙비가 1만 원 하던 시절이었다. 하루 2시간씩 주 3회 과외를 하면 한 달에 2만5천 원을 받았다. 지금 하숙비가 50~60만 원 정도니 과외비로 120~150만 원 정도를 번 셈이다. 서울대학교라고 광고만 하면 전화가 수십 통씩 왔다.
성경과 공부만
대학 선배의 소개로 1학년 여름방학 때 대구에 있는 성경 공부모임인 <한 알의 밀> 회원이 되고, 성경을 가르치던 김치영 목사(동산병원 원목)를 만나게 되었다. “유일하게 신앙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에요. 지금까지 실천적인 삶을 고민하게 된 것은 스승의 덕입니다.” 방학 때마다 내려가서 성경공부를 했다. 그 모임에서 대구가톨릭대학교(당시 대구 효성여대)에 다니던 동갑내기, 아내를 처음 만났다. 그때만 해도 대학 1학년이니 결혼 생각은 안했고 모임 회원의 한 사람으로 알고 지냈다.
대학교 2학년이던 1972년 10월 유신 휴교령으로 학교는 문을 닫았다. “전 대학교 때 운동권은 아니었어요. 성경공부도 하고 학비도 벌기 위해 <한 알의 밀> 회원들과 미아리에 2층집을 빌려 칸막이를 하고 과외를 했죠.” 목적은 성경공부를 위한 공동생활이었다. 과외를 하는 시간 외에는 성경공부를 했다. “1975년 경 대구 성경모임 멤버들이 김치영 목사님을 모시고 작은 교회 <한 알의 밀>을 설립했어요.”
학군단 출신인 정 이사장은 임관 후 2년 동안 고향 옆 진주에서 군 생활을 했다. 1977년 소집해제 후 여러 곳에 원서를 냈다. “그 당시엔 직장을 골라서 갈 수 있었어요. 당시에 대우 김우중 회장이 뜬다는 말이 있었어요. 인천 만석동에 있는 대우 중공업에 입사했습니다.”
교회가 맺어준 결혼
군대 생활과 직장 생활을 하면서 <한 알의 밀> 교회로 십일조를 보냈다. “그때 졸업을 하고 동산병원에서 약사로 일하던 아내가 교회 회계를 맡았는데 제가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니까, 이 사람은 아마 성실한 사람이겠다 생각했더라고요.” 어느 날 목사님의 사모가 정 이사장을 불러 아내와의 만남을 주선했다. 중매인 셈이다. 기미년인 1979년 3월 1일에 결혼했다. “잊을 수 없는 날이죠.”
결혼하고 신혼집은 회사와 가까운 인천 연안부두에 얻었다. 아내도 인천에 조그만 개인병원에 약사 자리가 있어서 계속 직장생활을 했다. 입사하고 2년이 조금 넘었을 때, 대우가 거제도에 조선소를 짓다가 부도난 조선회사를 인수를 했다. 거제도로 내려가라는 명을 받았다. 결혼한 지 채 1년도 안된 때다. 당분간 떨어져 지내기로 결심하고 내려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내가 임신을 한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 사표를 냈다.
사표를 내고, 3월에 서울대학교를 찾아갔다. 후기 대학원 시험이 6월쯤 있다. 지방으로 내려가기 싫으니 대학원에서 공부를 더 해볼 심산이었다. 기억에 남을 정도로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저를 전혀 기억 못 하던 교수는 졸업하고 바로 도전한 후배들도 대학원 시험에 떨어졌다고 말씀하셨어요. 전 이미 졸업한지 5년이 지난 때였죠.”
용접 품질 평가는 한국 최고
교수의 충고를 듣고 바로 대학원 생각은 버렸다. 직장을 가기로 결심했다. 호남정유에 설계/건설본부 품질관리 경력직으로 입사했다. “나중에 듣고 보니까 경력직 1명 뽑는데 200여명이 몰렸다더라고요.”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것이다. 호남정유는 지금의 GS칼텍스가 됐고, 22년을 다녔다.
금속 공학을 전공했다. 다양한 금속의 용접 상태를 평가하는 일을 한다. 학교에서는 용접을 가르쳐 주진 않았지만 그것도 금속의 분야이다. “대우 중공업에 있을 때부터 용접 이론을 책으로 배웠어요. 중공업이라는 게 결국은 다 쇠를 자르고 붙이고 하는 일이에요. 쇠는 용접으로 붙여야 하는데 최첨단 기술입니다.” 정 이사장은 미국석유 협회, 미국기계기술자 협회, 미국용접협회 회원으로 가입하여 선진화된 기술을 이해하고 한국에 접목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런 공로로 1997년엔 국무총리 표창을 받기도 했다.
“용접을 평가하는 분야에서는 내가 한국에서 제일 잘할 겁니다.” 한국 용접 품질관리 분야의 1세대다. 퇴직 전 마지막 직책은 선임부장이었다. “굉장히 좁은 분야여서 올라가는데 한계가 있었어요. 하지만 개인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확신은 있었죠.” 정 이사장은 승진보다 실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2001년에 회사를 그만두고 50살에 창업을 했다. 그때는 55~58살이면 은퇴하던 시절이다.
부천에서 만난 시민사회
서울 충무로에 있는 호남정유로 이직 후에 인천에서부터 서울 방향으로 이사를 하는, 이른바 ‘동진정책’을 펼쳤다. 집에서 회사가 너무 멀었다. 1980년 서울역으로 가는 삼화고속버스가 서던 인천 송림동에 살다가 1982년 부천으로 왔다.
“그 당시에 기업 연수를 받으러 왔다가 부천역 남쪽 성주산 자락에 있는 극동아파트를 봤어요. 천국처럼 보였어요. 당시에는 신도시도 없고, 근처에 삼익아파트만 있을 때였어요. 대치동 은마 아파트와 부천 극동아파트 모두 평당 100만 원하던 시절이죠. 그 때 강남에 아파트를 샀다면?”
부천에 살며 동아일보를 구독했다. “그 당시에는 그나마 시위 기사가 쪽으로라도 나오던 신문이 동아일보였어요.” “신문 사이에 장을병 교수 같은 존경하는 분들이 강의하는 YMCA 시민대학 광고지가 있었어요. 그때 내가 그 강의를 듣고는 부천시민사회에 입문을 했어요. 부천 지역시민 사회운동은 YMCA에서 시작됐죠.”
통 큰 헌금
부천으로 이사 오면서 진보적인 교회를 찾던 중 당시 황주석 YMCA 총무의 소개로 부천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다. 부천교회는 노동 청년 운동에 큰 역할을 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부천교회의 전도사로 부임하여 부목사가 된 이택규 목사가 1999년 지금의 역곡 연세 사랑병원 건너편에 지평교회를 개척했다. “부천교회 교우 중 시민사회의 어른이신 강희대, 김관식 두 분 가족이 새로 시작하는 이택규 목사를 도와야겠다고 지평교회로 출석했어요.” 정 이사장은 이에 공감하여 1년 후 부천교회에서 지평교회로 이적하였다.
2001년, 2003년 임대료가 계속 올랐다. 대체 부지를 찾아보기로 뜻을 모았다. 여러 곳의 후보지를 물색하던 중 지금 위치에 지평교회는 터를 잡았다.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배경인 원미동이다. 원미동 두산아파트 후문 쪽 빌딩이다. “당시는 갈비 집이었죠. 망해서 경매 매물로 나왔다더라고요. 그때 제가 GS칼텍스에서 막 퇴사했어요. 퇴직금의 절반 정도 되는 1억 원을 헌금하였고 교회 건물 구입에 도움이 되었지요.”
퇴직하고 창업한 회사는 <글로벌 21>. 주로 정유, 석유화학, 발전 플랜트 등에 소요되는 기자재의 품질과 건설공사의 공정을 감독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회사다. 서울 가리봉동(지금의 가산동)에 있던 사무실을 2003년 지평교회 건물로 옮겼다. “건물 관리도 해야 하고, 월세를 내서 교회 살림에 좀 보태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왔어요.” 교회 건물 매입 시에 은행으로부터 빌린 융자금의 원리금 상황 등에 필요한 비용 등 안정적 교회 수입에 임대료가 한 몫을 한다.
자린고비
지금의 성공이 처음부터 정 이사장의 손에 쥐어져 있던 것은 아니었다. 노력으로 일궈낸 성과다. “고등학교 때 입주 과외를 하던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눈물 나는 시절이에요.” 철저하게 생계형이었다. 결혼하면서 전셋집 구할 때도 양가 부모에게 도움을 전혀 못 받았다. 회사에서 돈을 빌렸다. 1975년에 졸업한 아내는 바로 약국에 취직했고, 결혼 후에도 계속 일했다. 의약분업이 되며 2003년 약국을 개업했다. 지금까지 일을 쉰 적은 없다. 둘이 합하면 88년간 갑근세를 내며 쭉 일을 한 셈이다.
“집사람은 자린고비에요.” 월급을 통째로 주면 아내가 관리했다. 늘면 늘지 줄지를 않았다. 전자제품은 고장 나기 전까지 사용한다. 집에는 아직도 쌀독이 있다. 쓰진 않는데 가지고 있다. “버리는 걸 싫어해요. 딸이 어릴 때 쓰던 식탁 의자를 지금 손자가 써요.” 최소 30년은 쓴 거다. 정 이사장은 집에 짐이 정말 많다며 혀를 내두른다. “60평 아파트가 짐으로 가득 차있어요. 딸이 결혼 할 때 마다 어디선가 보관하던 오래된 그릇이나 쓰던 가구를 꺼내더라고요.” 딸 둘이 시집가면서 그나마 집이 정리됐다.
정 이사장은 아내가 미용실에 가는 것을 서너 번 봤다. 그것도 정확하지 않은 숫자다. 딸 둘 결혼식이었다. 평소에 머리는 늘 묶고 다닌다. “딸 시집보내면서 한복을 하나 새로 맞췄는데 한복 안에 입는 속옷은 집사람이 시집올 때 입었던 게 있다며 꺼내 입더라고요. 제 집사람이지만 대단합니다.”
내 인생에 학점을 매기다
정 이사장이 마흔 셋이던 1995년, 회사에서 연수를 갔을 때 작성한 인생목표가 있었다. 2012년 60살이 되던 해, 사무실을 정리하던 중 그때 작성한 내용을 우연히 발견했다. “환갑을 앞두고 제 스스로 인생에 학점을 매겨봤어요.” 고심하며 작성했을 성적표를 나에게 내밀었다.
A+를 받은 부분은 전문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루 1시간 이상 하겠다는 계획이었다. 필요시 업무분야에서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겠다고 다짐했고, 2001년 창업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A+이다. 그리고 A+를 받은 또 하나의 분야는 기부이다. 총 수입의 12%를 교회 7%, 사회단체 3%, 장학 2% 사용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상당히 구체적이다. 평가는 계획보다 더 많은 기부를 했기에 A+이다.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능력을 쌓고 창업을 해 회사가 순조롭게 운영됐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또 55살까지 10억 재산을 모아 50% 이상 환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55살에 목표 금액을 채우지 못했지만 재작년 65살 때에 누계 10억의 기부를 하였다. 환갑 기념으로 희망재단에 1억5천만 원을 기부한 것도 이런 이유다. “아내는 동의는 안 하는데, 이해는 합니다.” 뚝심 있게 앞으로 나가는 그의 모습이 대단하다.
D를 받은 부분은 매일 일기 쓰기이다. “일기를 쓰지 않은 게 후회 되요. 살다보면 3~4달이 후딱 지나가요. 어떤 해에는 너무 바빠서 일 년에 한두 번 쓴 적도 있어요. 일기장은 있는데, 내용이 비었어요.” 매년 초의 다짐이지만 참 실천하기 힘들다.
앞으로의 포부
<(사)한국지역재단협의회>는 지난 해 5월 행정안전부로부터 설립허가를 받은 전국 지역재단의 연대단체이다. 부천희망재단을 비롯해 천안 풀뿌리희망재단, 안산희망재단, 성남이로운재단 등 9개 지역재단이 가입했다. 부천희망재단은 경기도 최초의 지역재단이다.
정 이사장은 <(사)한국지역재단협의회>가 있게 한 주역이다. 협의회 운영을 위한 정 이사장의 1억 원 지정기부가 동기부여가 됐다. “저는 이제 부천희망재단 이사장으로서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제 욕심은 지역재단이 더 자리매김 되어 전국 곳곳에 설립되는 것입니다. 지역재단의 명분이 다른 지역으로 파급되어 가는 것을 느껴요. 앞으로 5년 안에 50개, 10년 안에 100개가 설립 되도록 인큐베이션 역할을 하고 싶어요.”
정 이사장은 협의회의 모금위원장이다. 모금을 해야 직원들 월급도 주고, 운영이 된다. 정 이사장은 살아오면서 쌓아온 네트워크를 모두 활용할 생각이다. “제가 남한테 기부를 요청할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도 한 번 100억 원 모금에 도전해보려고요. 모금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기대 할 것 없는 한국 교회
정 이사장의 종교관이 궁금했다. "오늘날 돈의 노예가 되어 예수 없는 예수교회가 되어 버린 한국교회에는 기대할 게 없어요. 이미 탈종교화 시대이고, 종교다원화 세상으로 변하고 있어요. 그것을 아니라고 기독교가 유일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결과적으로 예수 정신을 회복하여 이타적인 심성과 삶을 늘려가는 것이 맞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짧은 기간에 민주주의 성과를 냈고, 그 과정에 있다 보니 나타나는 부작용이라고 말한다. 대학을 예로 들어 설명했다. 정 이사장은 한신학원 이사로도 일하고 있다. "대학은 어디보다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나 총장이 되면 수많은 청탁에 시달립니다. 임기 중인 이사의 자식이 교수가 되면 안 되겠죠. 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는 다 끈으로 연결되고, 그런 것들이 용인됩니다."
정 이사장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서는 길에 괜히 즐겁다. 건강하고 좋은 기운을 받아 힘이 난다. 건강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더 살맛나는 부천을 위해 달린다. 그리고 또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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