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위대한 여성필란트로피스트 백선행 여사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을 받고 지금 형무소에 있는 등 나라가 매우 혼란에 빠져 있다. 그 혼란의 가장 큰 원인은 문화사업이라는 명분하에 진행된 비도덕적 비윤리적 모금이다. 가장 희생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인 모금이라는 숭고한 수단을 악용하여 자기 욕심을 챙기려는 여성들이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 나라가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을 때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기부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위대한 어머니 여성 필란트로피스트분 들이 계신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여 교육, 문화 사업에 전 재산을 쾌척한 어머니들이다.
평양에 공회당을 세우신 백선행여사, 인정 도서관 설립자 김인정여사, 김천고보 설립자 최송설당여사, 신천 농민학교 설립자 왕재덕 여사, 대구 명신교 김울산여사, 휘문초교 안유풍여사, 보성학교에 기부한 안함평여사 등 수많은 여성 필란트로피스트가 계셨다.
그 시대에는 이 분들의 공적이 널리 알려졌으나 우리는 그런 사실 알지도 못하고 있었고, 후손에게 알리고 있지 못하다. 지금이라도 모금계에서는 이런 위대한 어머니들의 사례를 발굴하여 그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위대한 어머니들의 개인과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닌 나라와 민족을 위한 헌신을 돌아 보면서 우리들은 이 어지럽혀진 세상을 바로 잡을 지혜를 모아야 한다.
백선행 여사
백선행은 가난한 농민 외동딸로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 어머니와 가난한 생활을 했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결혼 2년만에 남편을 잃고 열여섯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백선행은 모진 노동과 장사일로 부지런히 일했다. 그녀는 이렇게 조금씩 모은 돈으로 평양 주변의 땅을 구입하여 재산을 늘렸다. 그러던 중 다른 사람들은 거들 떠 보지 않았던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 바위산을 헐값에 사서 일본인에게 비싸게 팔아서 큰 이익을 얻었을 수 있어서 그녀는 평양 제일의 여성 갑부가 되었다.
첫 공익사업으로 백선교라는 다리 건설에 기부하였고, 조만식 등 유지들의 건의에 따라 30만 원의 거금을 출연하여 평양의 각급 학교와 시민들을 위한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평양 최대의 대공회당과 도서관을 보유한 백선행기념관을 설립하였다. 백선행기념관은 지금도 평양에 남아 있다. 또한 한평생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여사는 육영 사업으로 광성소학교, 숭현여학교, 창덕소학교에 부지 기증하였다. 그 덕분에 글조차 읽지 못하는 백선행은 위대한 교육자로 추앙받게 되었다.
백선행의 위대한 점은 어렵게 평생 모은 재산을 모두 사회에 기부하였다는 점이다. 당시 그녀가 기부한 30여 만원은 현재의 가치로는 300억원에 달한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평양 사람치고 그녀를 존경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을 정도였고, 1933년 백선행이 세상을 떠나자 평양 시민은 조선 최초의 여성 사회장을 거행하였다.
다음은 당시 동아일보에서 백선행 여사를 기리는 사회장에 대한 기사이다.
1933년 5월 11일 동아일보 사설
백선행여사의 社會葬. 그의 덕과 공적
평양을 생각할 때에는 누구나 백선행여사를 생각하리만큼 백선행여사는 유명하게 되었다. 그가 지난 8일 80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매 평양의 20개 단체가 연합하야 오는 13일에 사회장의 예로 그에 보낸다 함은 극히 당연한 일이어서 조선 이천삼백만인 중에 하나도 이에 대하여 의사를 가지는 이는 없을 것이다. 도로여 어떻게 하면 이 희구한 할머니를 더 후하게 대접할 수 있을까를 아쉽게 생각할 것이다. 평양시민의 공동한 재산이라할 백선행기념관만이 그의 공적이 아니오, 숭인고등학교 기타의 문화사업에 보탠 거액의 기부만이 그의 공적이 아니다. 차라리 입입신고, 분분혈한으로 모은 소년과부의 재산을 아낌없이 민족봉사, 사회봉사의 예물로 바친 그 정신이야말로 조선의 감사와 찬송을 받을 주되는 이유일 것이다.
재산을 가진 이가 백여사 뿐이 아니다. 조선이 비록 빈약하다 하더라도 30만원 이상의 재산을 가진 이는 백으로 써 헤일 것이오, 백만 이상의 재산을 가진 이도 30은 넘는다고 한다. 그러하지마는 백여사와 같이 전재산을 들어 사회에 바친 이는 아직 듣지 못하였다. 십만원 이상의 재산을 민족봉사에 바친 이도 4-5인을 곱을 수 있을까.
조선이야 말로 교육시설로 보아 산업으로 보아 공중위생기관으로 보아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비상시기에 있다. 이 때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재산가의 재산 제공이다. 근래에 많은 인재가 직업을 잃고 방황하고 있으니 만일 재산가들이 혹은 산업방면의 혹은 문화방면의 사업을 일으켜 이 인재들을 이용한다 하면 조선의 진보는 십년을 지나지 아니하여 괄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조선의 자력갱생이오 이 자력갱생의 열쇠를 가진 이는 조산의 재산가다. 조선의 재산가가 백여사의 자취를 밟아 전재산을 민족문화사업에 쓰게 되는 날이 곧 조선갱생의 날이다.
백선행여사는 그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일생에 절을 지켰으니 그는 예 도덕으로 말하면 열녀요 오늘 도덕으로 말하면 의리를 지킨 이일뿐더러 저를 제가 통제하는 인격자다. 또 백여사는 홀로된 어머니를 임종까지 섬겼다. 이는 효다. 백여사는 효와 열을 겸한 의인이다. 이것도 물론 갸륵한 일이다.
그렇지만 조선의 재래 도덕은 그 주력은 대개 개인관계에 치우치게 둔 유감이있다. 곧 아비에게 대한 아들의 의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의무 등 그리하고 기껏 범위를 넓힌다야 일가족, 일문 중에 지나가지 못하였다. 조선 재래의 도덕 관념은 전민족, 전 사회에 대한 의무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아니하였다고 할 만큼 희박하게 가고 있었다. 충이라는 것도 겨우 군주 일개인에 대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므로 조선에 효자와 열녀와 충신이 많았으나 진실로 민족 전체 또는 한 지방의 민중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재산과 일생을 바친 이는 극히 드물었다.
세계에 민족사상이 팽창하는 오늘날에도 아직 부조의 분묘를 꾸미기와 족보를 간행하기에 많은 돈을 들이는 고루한 생각이 빠지지 아니하였다.
조선민족은 민족 전체, 민족주의의 도덕을 확보하지 아니하면 그리하고 민족봉사를 위하여 돈과 몸을 바치는 것으로 가장 큰 의무와 자랑을 삼지 아니하면 조선의 자력갱생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도무지 교육도 받은 일이 없고, 부모의 유산도 남편의 유산도 받음 일이 없고 국가와 사회의 은혜를 받음도 극히 박한 불쌍한 과부 백선행여사가 그가 필생에 모은 30만원 재산을 전부 문화사업에 바치고 빈 몸으로 세상을 떠나게 된 백선행여사는 우리에게 지극히 귀한 교훈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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