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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KSoP 부회장] 국채보상운동은 성공한 모금캠페인이다.
  • 작성일
  •   2021.09.08 2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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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훈 KSoP 부회장] 국채보상운동은 성공한 모금캠페인이다.

우리 모금전문가들은 국책보상운동을 자세히 들여다 봄으로써 비록 모금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훌륭하게 캠페인을 전개하신 선배들의 지혜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먼저 국채보상운동은 알려진바와 달리 실패한 운동이 아니다. 오히려 모금 캠페인 측면에서 보면 유례를 볼 수 없는 성공한 캠페인이다.

그 당시 국가 경제나 국민 소득 등을 감안할 때 모금 시장의 규모를 추산하였을 때 짧은 기간에 최대의 모금 실적을 올렸다.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년 담배 판매고 200만원의 10%이 넘는 20여만원이 반년만에 모였다. 서울의 경우 성인 남자의 절반이 참여하였다. 지금과는 다른 열악한 상황에서 전국적인 모금 캠페인의 성공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면 성공의 요인은 무엇일까?

1) 구국이라는 애국활동과 금연이라는 계몽 활동이 결합된 세계에 유래가 없던 캠페인이었다. 구국이라는 동기가 아무리 좋아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지침이 필요한데 금연이라는 저절한 행동 실천 지침을 만들었다. 나라 살리기 방법은 삼개월 금연이라는 민중에게 명확하게 전달되어 행동할 수 있게 만들었다.

​2) 독립문 건립 캠페인의 영향이 컸다. 모금으로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 등을 세울 수 있었으며 신문을 통한 모금과 기부자의 성명이 신문에 실린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매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고 생각된다.

3) 즉흥적으로 시작되고 급격하게 진행된 캠페인임에도 불구하고, 초기 단계에 전국적인 통합체를 만들고자 하는 노력으로 역할 분담을 하였다. 시작단계부터 전국적인 모금의 통합을 위해서 국채보상기성회, 중앙의무소, 국채보상금지원총합소, 국채보상연합회의소 등이 발족되었고, 초기에는 상호 경쟁 구도였으나, 총합소와 협의회가 역할 분담을 하여 진행하였다. 자체적인 감사 기능을 가지고 의연금 유용 그리고 친일파의 참여를 조기에 발견하고 차단하였다.

4)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이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수납업무까지 담당한 프레스 캠페인이다. 신문사별로 전국적인 의연금 통계가 가능하였다. 모금이 종결된 이후에도 국채보상금 처리회를 통해서 전국적인 모금의 규모가 파악되었다.

5) 시민, 여성 등 전국민이 참여한 시민에 의한 풀뿌리 모금 캠페인이었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등을 통해서 시민 의식이 성장하였고, 지식인, 민족주의자, 의병장 등이 지도자가 되고, 남녀 노소, 낮은 지위 관리, 군인, 도시 서민, 농민, 기생, 백정 등 민중으로부터 시작된 소액 풀뿌리 모금을 통한 국권회복 시민운동이다.

​6) 국채보상금처리회에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토지를 구매하여 교육 사업을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민족의 지도자들이 친일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려고 하였고 민립대학설립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왜 국채보상운동이 실패하였다고 결론 짓고 있나?

1) 국채보상금 1300만원을 모금액에 도달 못했다는 점이다.

2) 즉흥적인 감정으로 시작되어 조직적, 통합적 운동이 아니었다는 지적

3) 사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지적

4) 일본의 방해 공작에 대처하지 못하였다는 점

 

그렇지만 위와 같은 지적은 많은 부분이 잘 못된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당시의 우리나라 경제 상황이나 모금 시장을 분석해 보면 일년 이내에 모금할 수 있는 액수를 초과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문건설 모금 캠페인이나 샌프란시스코 지진 동포를 위한 모금 현황을 보았을 때 20만원을 모으는 것은 대단한 성공이다. 20만원은 1907년 국가 예산 1300만원의 1.5%로 2020년 우리나라 국가예산 515조원과 비교해보면 7.7조에 해당하는 금액인 것이다.

참고로 2020년 12월부터 두달간 사회복지공동기금의 이웃돕기 캠페인의 목표가 3600억원인 점을 보면 당시 20만원의 모금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을 위하여 사전에 모여서 공론화를 통해서 통합조직을 만들어서 시작할 수 있었을까? 그런 시도를 일본이 알게 되었을 것이고, 사전 방해 공작으로 시작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기습적으로 진행하였기에 모금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아쉬웠던 점은 남는다.

1) 무엇보다도 리스크 회피 전략 그리고 출구 전략이 미흡했다. 당시 나섰던 사회 저명 인사들 중 많은 인사들이 친일 또는 경계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기에 일본의 방해 공작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았다.

2) 모금된 의연금의 운용에 대한 의견이 분열되었던 점이다. 먼저 일본의 횡령사건 조작의 빌미를 우리가 제공하였다. 대한매일신보 사장으로 국채보상운동에서 기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베델이 의연금의 증식을 위하여 주식에 투자하였는데 그것은 이해하지 못하고 횡령으로 의심한 것이다. 그런데 그가 투자한 한성금광주식회사의 수안금광은 후에 세계적인 금광이 되었다.

당시에 우리 국민들은 주식 투자에 대한 개념이 미약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동양척식회사의 주식 공모 당시 일본에서는 경쟁율이 높았지만 국내에서는 미달이었다고 한다.

3) 일본의 방해 공작으로 모금이 중단된 다음, 출구 전략을 위한 결산과 함께 활용 방안을 도출하는데 시간이 지체되었다는 점이다. 마침내 토지를 사서 교육사업을 지원하기로 어렵게 합의를 보았지만, 이미 나라는 일본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채보상운동은 성공한 모금캠페인이지만 정치적인 상황으로 마무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4) 마지막으로 금연을 3개월만 하지고 한 것도 아쉬운 부분이다. 담배를 완전히 끊어서 지속적으로 의연금을 낼 수 있어야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모금 캠페인이 6개월만에 종결이 된 것도 3개월 금연이라는 것이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출처] MANGOPost
[원본http://www.mangopost.org/news/articleView.html?idxno=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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